로얄 코펜하겐
푸른색 꽃무늬로 세계적 도자기 명성을 쌓은 덴마크의 명품 도자기
1770년초 화학자 뮐러가 덴마크의 천연원료를 사용해 자기의 소성에 성공하자
독일에서 덴마크로 시집온 율리아나 마리 왕비는 뮐러를 지원해 1775년
"덴마크 도자기 제작소"를 개설했습니다.
덴마크왕가는 처음에는 재정지원만을 했는데 공장이 경영난에 빠지자
1779년 "왕립 코펜하겐 자기제작소"로 명칭을 바꾸고 왕가의 직접적인 관리체제로
변화시켰죠.
그후 1백년간을 왕실전용가마로 덴마크왕실에서 사용하는 도자기만을 제작해내던
왕립 코펜하겐제작소는 1868년 민간기업으로 바뀌며 로얄칭호를 얻고
일반시민들도 제품을 접할수 있게 되었답니다.
로얄코펜하겐의 제품들은 "로얄코펜하겐 블루"로 지칭될 정도로 독특한 코발트 색조로
그린 푸른빛 꽃무늬가 단연 돋보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흰바탕에 꽃무늬가 그려진 "블루 플루티드"는 로얄코펜하겐의 오랜역사와 맥을 같이 해
트레이드 마크를 구축했는데 자기세트뿐만 아니라 필기도구, 화분등에까지도 다양하게
사용되었죠.
세계적인 도자기 무늬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블루 플루티드는 고대 중국도자기 무늬
를 첨가한 반장식형 , 가장자리에 실로 짠 듯 레이스 무늬를 넣은 전체 장식형의 세 종류
가 있습니다. 푸른꽃 무늬는 완전한 수작업으로 제작되며, 단 한번의 붓질만으로 다양한
꽃의 형태와 명함효과, 색깔의 오묘한 뉘양스를 표현에 내는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각기 서로 다른 손 힘으로 강약을 조절하며 붓칠을 해야만 가능합니다.
채색과 장식이 끝나면 바닥쪽에 로얄코팬하겐을 상징하는 사인을 남기게 되지요.
이 과정이 모두 완료되면 덧칠한 뒤 섭씨 1450도의 열로 자기를 굽게됩니다.
이것은 로얄코팬하겐의 특징으로 로얄코팬하겐은 본 차이나로 만들지 않습니다.
전에 설명드렸다시피 젖소뼈를 흙에 섞어 반죽에 구운 본 차이나는 가볍고 탄력이 뛰어나
세계의 내노라하는 영국의 도자기사들이 거의 이 방식을 본뜨고 있는데 로열코팬하겐은
대부분의 도자기사들보다 약 2백도가 더 높은 섭씨 1450도의 고열에서 자기를 굽습니다.
그래서 생산된 자기는 보통 빚은 때 보다 15%정도 작아진 채로 완성되는데 이렇게
되어야만 자기에 충분한 탄력과 적당한 무게가 생겨 품격이 더해진다고 로열코팬하겐
제작자들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로열코팬하겐의 자랑하는 또하나의 세계적 고전으로 '플로러 데니카'가 있습니다.
이것은 1790년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앙 7세가 러시아의 열렬한 도자기 수집가인
카타리나 2세 여왕에게 선물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품입니다.
후첸로이터
유럽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도자기 회사
후첸로이터의 역사는 칼 마구누스 후첸로이터와 더불어 시작됩니다.
1794년 탄생한 그는 발렌도르프 투링기아에 있는 부친의 공장에서 자기를 장식하는
기술을 습득했습니다. 18세때 그는 귀족들에게 자신이 만든 장식자기들을 내다 팔며
프랑코니아와 보헤미아를 여헹하며 진로를 모색했습니다.
후첸로이터는 보헤미안 귀족들의 거주지였던 프랑코니아 북부에 위치한 호헨베르크를
여행하고 나서 1814년 이곳에 도자기공장을 세웠습니다.
호헨베르크에 바바리안 자기공장이 처음 세워졌을 때 그 어느 누구도 오늘날 독일 자기
산업의 95% 이상을 이지역에서 독점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었죠.
초기의 후첸로이터는 백색 무장식자기를 만들었습니다.
이 제품은 지금도 투링기아에 가면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첸로이터는 장식용 자기 이상의 것을 손수 제작해 볼 것을 꿈꾸었습니다.
즉 순백의 금 이라 불리워지는 투명 도자기를 만들고 싶어했던 것이죠.
각고의 노력끝에 투명도자기제작에 성공하였으며 일반대중에게도 자기를 보급시킨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대표작품으로는 1930년대 이래 마이센의 타이처드로부터 생산특허권을 넘겨받고
생산해온 블루 오니언이 있습니다.
레녹스
미국에서 탄생한 최고의 정찬용 도자기
유럽이나 영국의 도자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았던 미국의 도자기는
1백년전만 해도 품질이 떨어지는 조잡한 디자인의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환경속에서 미국 뉴저지주 트렌튼에서 태어난 도공 월터 스코트 레녹스는
1889년 다른나라의 유명한 가마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품질 좋은 도자기를
만들기위해 세라믹 아트회사를 설립했습니다.
레녹스가 목표로 했던것은 아일랜드의 베리크지방에서 아주 소량만 제작되고 있던
자기를 개량해서 독자적인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었죠.
1906년 회사명도 레녹스로 바꾸고 10년후에는 온화한 분위기를 주는 상아색의 튼튼한
레녹스 차이나를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레녹스의 특징은 윤기있는 유약이 발라진 상아색의 표면과 높은 투명도, 견고성,
소박함이며 파티에서 일상생활까지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레녹스의 전통은 백악관의 역사와 같이 하고 있으며, 미국의 역대 대통령이 주최하는
수많은 만찬에서 테이블을 수놓은 레녹스 테이블웨어는 미국의 영광스런 차이나로
불립니다.
마이센
유럽도자기의 모태로 2백80년간 수작업의 전통지킨 독일의 명품
폴란드와 동독을 통치하던 작센지방의 왕 아우구스트 2세는 마르코 폴로가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에 전파한 동양의 자기에 병적일 만큼 애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수집정도로 만족을 못한 아우구스트 2세는 당시 유럽에서는 제작을 할수 없었던
얇고 투명한 백색자기를 만들 것을 화학자이며 연금술사인 요한 프리드리히 뵈르거를
불러 명령하였고, 1709년 백색자기의 제조에 성공하였습니다.
극비에 부쳐졌던 기술은 외부로 유출되어 1718년 비엔나 가마등 여러 가마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리아별 가마의 등장은 마이센에게 분발을 촉진, 발전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1722년 마이센은 비엔나의 천재도공인 요한 그레고리우스 회롤트를 맞이들여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도자기 회사들이 곳곳에서 생겨나자 마니센은 품질보증을 위하여 상표를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아우구스트의 이름을 따서 AR(AUGUSTUS REX)을
새겼다가 1723년 작센지방의 상징인 쌍검을 새겨넣었습니다.
상징적인 묘사를 통해 자연과 사회의 현상을 비유적으로 자기에 표현하는 것이
마이센의 특징이며, 그중 양파도안은 사실은 석류열매로 동양의 종교의식에 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석류열매가 낯설었던 작센인이 양파(onion)처럼 인식, 양파식기라 불렀습니다.
왕의 행렬, 동물모형들을 계속 창작해낸 마이센은 1918년에 왕의 소속이 아닌 국가의
전매청으로 바뀌었으며 현재까지 국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헤란드
헝가리의 전통과 격조를 환상적 색조에 담은 예술품
빈스 스팅글이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하던 오스토리아제국에 속했던 전원도시
"헤란드"에 1826년 작은 도자기 공장을 세움으로써 헝기리의 도자기 산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오스트리아 궁전의 융성과 더불어 헤란드는 유럽 일류가마의
정점에 서게 됩니다. 초기에는 외국자기(마이센, 비엔나공장)의 제품을 모방하였으나
점차 모방에서 벗어나 헤란드의 전형적인 양식을 구축하였습니다.
그 중 특이한것이 투각법과 망세공법으로 투각법은 조그맣고 예리한 칼로 도자기를
섬세하게 도려내어 모양을 만드는 방법이고, 망세공법은 점토를 실처럼 만든뒤 틀에
의지하면서 형태를 짜올리는 방법이었습니다.
헤란드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끌게 된 것은 당시 유럽왕들이 단골손님이었으며,
각종 국제대회에서 수상하면서 부터입니다.
1949년 헤란드자기 제작소는 국유화되었으며 1960년대에 들어서며 헤란드는
대대적인 시설 투자로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아직도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 하는
헤란드의 자기는 스피드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예술품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포드
획기적인 본차이나 개발로 영국도자기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긴 명가
18세기 말까지 영국은 본차이나의 개발에서 유럽에 뒤져 있었습니다. 영국의 여러 도자기
회사들이 고령토에 젖소 뼛가루를 섞은 본 차이나의 기술개발을 앞다투어 시도했으나
완전한 제작을 하기는 힘들었었죠. 1770년 뱅크스에 공장을 설립한 조사이어 스포드는
이미 진행되고 있던 질그릇에 청색의 밑그림 프린팅 기법을 1784년 완성시켰습니다.
스포드가 사망하자 사업을 물려받은 스포드 2세는 선대의 작품으로 수많은 실험을
반복하여 대륙의 마이센 도자기에 필적할만 한 획기적인 도자기를 개발했습니다.
은은하고 탄탄하며 깨끗한 순백색의 반투명으로 빛나는 파인 본 차이나의 제조법을
확립시킴으로써, 스포드 2세는 영국 도자기의 역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앤슬리
이국적인 정취와 전원미가 식탁의 품격을 높여주는 명품
영국 스텐포드셔에서 탄광을 경영하며 취미로 도자기를 만들던 존 앤슬리는 막대한
도자기 시장이 형성될 것을 깨닫고 1775년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앤슬리는 중국, 일본에서 수입되던 도자기에 매료되어 솜씨좋은 장인들을 대거
배출시켜 영국귀족들이 흡족할만한 제품들을 생산했습니다. 높은 기술과 풍부한 묘사력,
소박한 멋이 삼위일체를 이룬 앤슬리의 분위기는 손잡이가 달린 찻잔, 받침접시,
크기와 모양이 다양한 찻주전자 등의 신제품에 유감없이 발휘되었고 개인용, 손님용으로
용도분리되어 생산됨으로써 더욱 호평을 받았습니다.
경영수완과 명공의 솜씨를 겸비한 존 앤슬리 2세는 시대를 앞선 감각으로 파인 본 차이나를
제작해 앤슬리의 평판을 확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앤슬리 본 차이나는 차와 커피를
즐겨 마시던 영국문화 전체의 역사를 반영하며 차와 커피 맛에 플러스 알파를 보탰습니다.
리차드 지노리
식기에서 켈렉션까지 폭넓은 작품을 만드는 이탈리아 최고의 메이커
이탈리아의 명품 리차드 지노리는 1735년 피렌치의 카를로 지노리 후작이 자신의
영토인 도이치아에서 창설한 회사입니다. 리차드 지노리의 특징은 중국자기의 원료와
독일의 제조기술을 받아들여 이탈리아적 페인팅과 마무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여행중 일류호텔에 묵게되면 어김없이 리차드 지노리의 접시나 커피세트로
식사대접을 받게 되는데, 지노리는 현재 이탈리아 전역에 7개의 가마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로젠탈
현대적인 감각이 낳은 극적인 디자인
로젠탈 도자기회사는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한 독일 남부의 오버프랑켄지방의
소도시인 셀브에서 1879년에 창설되었습니다. 과거 도자기회사들이 왕실이나 지방의
영주들이 설립했던 것과는 달리 로젠탈은 시민계급이던 필립 로젠탈이 세웠습니다.
로젠탈사가 궤도에 오른것은 그의 아들대에 와서입니다. 필립 2세는 제2차세계대전후
유럽의 미술 공예가 과거의 모방에만 사로잡혀 복제품을 만드는데 급급함을 보고
실망하여 도자기 디자인에 20세기 감각에 맞는 현대적인 감각을 도입하여 극적인
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로젠탈의 디자인은 1950년초반에는 미국의 실용주의 감각에
크게 영향을 받았고, 1950년 후반에는 스칸디나비아의 스타일에서 디자인의 모티브를
찾았습니다. 그 후 아예 각국의 유명 디자이너들을 영입하여 수많은 도자기 콘테스트에서
수상하며 명성을 높였습니다.
현대 로젠탈의 브랜드는 두개로 나뉩니다.
첫째는 스튜디오 라인으로 세계의 최고 아티스트들이 참여하는 로젠탈의 중심라인입니다.
기능을 중시하면서도 디자인이 심플하고 세련된 작품 하나 하나에는 디자이너들의 친필
사인이 들어가며 그 수도 1백개 미만으로 만들어집니다.
두번째는 로젠탈의 보급품 라인입니다. 이 작품은 로젠탈 스튜디오라인에 비해서는 한단계
낮은 라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유명 예술가
들이 아니라는 점과 가격이 스튜디오 라인에 비해 저렴하고 대량생산이란 점이 다르죠.
비록 연대는 다른 자기 회사에 비해 오래지 않았지만 독일을 대표하는 로젠탈은
실용성과 기능성 그리고 독일인 특유의 예술성이 돋보이는 명품자기 위치에 있습니다.
빌레로이 & 보흐
귀족적 기품에 실용성이 가미된 독일의 자랑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처음으로 도기공방을 열었던 빌레르이 & 보흐는 현재 독일과
룩셈부르크에 거점을 두고 있는 유럽도자기산업계의 최고봉입니다.
빌레로이 & 보흐는 1748년 창립하였고 테마는 "우아함이 밴 기품과 사용하기 편리함"입니다.
안정되고 차분한 색조가 특징으로 언제나 은은히 흐르는 귀족적인 품위와 단정한 멋이
넘칩니다. 모던한 것에서부터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것까지 다양하죠.
최근에는 식기세척기나 전자레인지에도 견딜수 있는 것이 개발되어 뛰어난 내구성을 자랑합니다.
특히 빌레로이 & 보흐는 사치스러운 화려미보다는 소박한 섬세미가 돋보이기 때문에
일상 식기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시리즈 하나 하나가 색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어서
우아한 귀족풍을 좋아하는 사람부터 자연스런 서민풍을 중시하는 사람까지 다양한
기호를 만족시켜주지요.
베르나르도
전통과 현대의 조화로 자기 예술의 국치를 이루는 프랑스자기의 명가
베르나르도는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던 1863년, 프랑스의 작은마을 리모쥬에
도자기공장을 세워 자기를 굽기 시작한것으로부터 역사가 시작됩니다.
세계의 유수회사와는 달리 베르나르도는 창립 직후 왕실에서 열리는 리셥션의
테이블웨어로 사용됐을 정도로 순탄한 길을 걸었습니다. 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획득하는등
국제적인 상을 여러차례 수상하였으며, 창립자인 베르나르도의 정신을 이어받아 후손들은
리모쥬에 계속 투자를 하고 사업을 확장하였습니다. 현재 베르나르도는 4개의 공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 공장들은 최첨단 시설을 갖추었습니다.
자기와 창조성 이 두가지는 베르나르도 제품에 있어서 불가분의 관계로 자기에 작품정신을
불어넣은 독창적인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베르나르도는 매년 20명의 새로운 디자이너를 영입하고 있으며 1985년이후에는
베르나르도상을 제정하여 신인디자이너 배출과 육성에 힘쓰고 있습니다.
베르나르도가 이처럼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된 비결은 고령토, 석영, 화강암이
적당하게 섞인 리모쥬의 좋은 흙과 훌륭한 디자이너와 숙련공, 베르나르도의 창조에의
열정과 정신입니다.
크리스토플
1백60년 전통에 빛나는 프랑스 은식기 전문회사
견고하고 수명이 긴 포크, 나이프, 스푼세트로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크리스토플은
1830년 베르사이유궁의 전속 보석상인이었던 조제프 부비애가 처남 샤를로 크리스토플과
함께 파리 마레지역에 금은보석 세공공장을 세운것이 시작입니다.
1841년 크리스토플은 5백만 프랑을 주고 아리드 뤼올즈 공작의 금은 도금특허를
사들였고 최초로 은도금 식기류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은도금하기전의 스푼, 포크, 나이프의 바탕금속은 양은인데 양은은 구리, 아연, 니켈이
합금된 것으로 니켈 함유랑이 많을수록 단단하고 색이 하얗고 은도금이 잘되며
변색이 드물죠.
크리스토플 제품은 15%의 니켈을 함유하고 있고 대형의 은도금제품은 양은과 구리.
아연의 합금인 놋쇠를 바탕금속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쟁반과 같이 흠이 나기 쉬운
것은 양은을 바탕 금속으로 하고 있습니다.
은도금 제품의 품질은 은도금 하기전의 준비과정이 결정적입니다.
무조건 은이 두껍게 도금되었다고 좋은제품이 아니며, 얼마나 은이 고르게 잘
고착되었는가가 중요한데 크리스토플은 양은 스픈을 50회에 거쳐 연마기로 갈고 닦아
표면을 매끈하게 만들고, 천으로 광택을 낸 후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먼지를 털어내기 위해
초음파를 이용한 방밥으로 세척을 하는 공정을 거칩니다.
이렇게 아주 미세한 더러움이나 먼지까지도 완벽하게 제거를 한후 은도금을 하는데
스푼이나 포크의 등과 끝부분 등 마멸되기 쉬운 부위는 은이 뚜껍게 입혀지도록 방향을 잘
맞추어 놓습니다. 전기분해로 은도금을 할때 속이 깊은 제품들은 그 두께가 균일하지 않기 때문에
크리스토플은 내부에 보충도금을 하나하나 다시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은도금이 끝난
제품들은 검인, 상표가 찍혀지고 마지막 품질검사를 받게 됩니다.
크리스토플은 은식기제작외에도 1984년부터는 도자기도 생산되고 있으며 1986년
부터는 금은보석도 제조, 판매하고 있습니다.
민튼
영국의 화려한 귀족취미를 대표하는 "식탁의 꽃"
민튼은 1793년 프리랜서 디자이너인 토마스 민튼이 영국의 요업의 중심지인 스토크 온
트랜드에서 창설되었습니다. 민튼은 동양적 감각으로 특히 일본이나 중국의 도자기의 영향을
받은 은은한 색조와 우아한 무늬기법을 주로 활용했습니다. 민튼도자기를 세계적인 도자기
서열에 올려놓은것은 토마스 민튼의 아들 하버드였습니다. 그는 우수한 디자이너를 영입해와
수채화 같은 색채, 전원풍경등 영국인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제품에 반영하면서
빅토리아여왕의 총애를 받았죠.
오늘날 민튼은 각국의 영국대사관 만찬회에서 "식탁의꽃"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민튼의 또하나의 자랑거리는 누구도 따라올수 없는 도자기에 순금을 입히는 테크닉입니다.
순금을 입힌 민튼의 테이블웨어는 세계에서 가장 고가이며 화려합니다.
대표품목으로는 화려한 꽃무늬의 "하든홀"이며 민튼의 베스트 셀러임.
현재 민튼은 로얄알버트, 로얄크라운더비, 로얄덜튼과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로얄덜튼 그룹에
속해있습니다.
야드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각가들이 직접 만드는 스페인의 명품 도자기상
야드로는 스페인의 베네치아 농부가정의 야드로 3형제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도 도기공장에서 일을 했으며 뒤에는 조각과 페인팅에
몰두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집에 가마를 설치하고 도자기 예술품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1950년대 상반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도기제품을 시판하기로 결정하지만 몇 번의 실패
뒤에야 성공을 거둘수 있었으며, 1960년 야드로 형제는 공장을 확장하여 10년도 채
않되어 7개로 공장을 늘렸습니다. 수출시장의 확대로 1969년에는 도공 1천5백명 이상을
지닌 새로운 도자기 공장으로 성장했습니다.
고전적인 인간의 모습, 동물의 세계, 어린이, 새, 항아리드의 아름다움은 야드로의
대표적 생산품입니다. 야드로 회사에서는 각각의 제품 생산이 끝나면 원형과 주조틀을
없애버려 이 작품을 구입한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특권을 갖게 합니다. 소수의 제한된
작품을 고객이 구입할 경우에는 야드로 가족중 한명의 사인이 들어간 품질 보증서를
받게 되는데 이것은 이 작품이 유일하다는 것을 보증해 줍니다.
조지젠슨
북유럽의 전통이 살아있는 조형성 뛰어난 은세공품
1866년 덴마크 코펜하겐 북부 공장지대에서 태어난 조지 젠슨이 작은 은공방을
차린것은 1904년입니다. 젠슨은 꽃이나 곤충을 주제로 많은 액세서리를 만들었으며,
동업자인 디자이너 요한 로드를 만나면서 상호 보완관계를 유지하며 우수한 작품을
수없이 탄생시켰습니다.
뛰어난 조형감각과 완전성을 추구하는 높은 장신정신으로 만들어진 젠슨의 작품들은
오늘날 전세계 50개 박물관에서 영구 보존품으로 소장하고 있습니다. 젠슨의 작품에는
북유럽의 전통인 심플함과 모던함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젠슨의 사후 그의
솜씨는 탁월한 디자이너들에게 계승되어 은공예 부문에서 젠슨의 이름은 독보적이며
현재 젠슨사 소속의 디자이너는 30명선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해마다 올해의
티스푼과 크리스마스용 장식품 등 새로운 상품들을 선보이고 있는데 매작품마다
디자이너의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