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남아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해 태조 7년(1398)에 완공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63년 해체 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 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의 2층 건물이다. 현판은 ''지봉유설''의 기록에 의하면 양녕대군이 쓴 것이라고 한다.
처음 지은 시기도 정확히 알 수 있으며 견고한 수법과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조건 전기 건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이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1880
남대문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다.정문 좌우에는 초가지붕이 길게 늘어져 있으며 행인의 차림새는 흰 옷 일색이다.
1880
1890
남대문 안, 멀리 남대문이 보인다.1890
정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늘어져 있던 초가집들이 기와집으로 개조되었다.알몸으로 달리는 아이가 이채롭다.
아이의 행색과 부채로 햇볕을 가리며 걷는 행인의 모습으로 봐선 여름 한낮이었던 것 같다.
그 뒤에 검정 장옷을 뒤집어 쓴 여인이 더위를 견디면서 뒤따르고 있다.
1895
길 양편에 서 있는 시장은 1608년(선조 41년) 대동미(大同米)·포(布)·錢)의 출납을 담당하던 선혜청이 지금의 남창동에 설치돼 지방 특산물 등을 매매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고 한다.1899
오른쪽의 전차 선로는 1899년 1월에 남대문과 용산 간에 부설된 것이다.프랑스 외방 선교회 신부들이 남대문 앞을 산책하고 있다.
남대문 정문 안으로 뻗어있는 철로를 타고 전차가 움직이고 있다.
1900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한가롭게 놀고 있다.왼쪽 산은 만리고개이다.
1900
1900
문 앞에는 아침마다 나무장사들이 운집하여 이 거리는 소란하고 상품종류도 다양했다.문 부근에는 칠패시장이 열려 남대문시장의 효시가 되었다.
1904 호주의 사진작가 George Rose
1904 호주의 사진작가 George Rose
1904 호주의 사진작가 George Rose
1906
남대문 전차 궤도 부설 공사를 위해 자재를 운반하고 있다.1907
구한말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1907년 일본 황태자의 조선 방문 때 남대문 앞에 세운 대형 아치.사진에는 일진회의 이름이 담긴 대형 아치 위에 태극기와 일장기가 교차해 있으나 아치의 중간에 ''받들어 맞이한다''는 의미의 ''봉영(奉迎)''이라는 문구와 함께 중앙에 일본왕실을 상징하는 사꾸라 문양이 새겨져 있다.
1907
양쪽 성벽은 1899년(광무 3년) 전차가 개통되면서 일분 훼손된 뒤 1907년(융희 1년) 또다시 크게 헐렸다.당시 방한했던 일본 왕세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을 지나갈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이로부터 남대문은 양쪽에 날개쳐럼 성벽을 지녔던 당당한 모습을 잃어버리고 외로운 섬처럼 고립됐다.
일제시대
1910
1940
한국전쟁
1950
1951
출처: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사진자료실 | 소설가 박도 | 눈빛출판사의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한국전쟁 중 포격에 의해 석축과 지붕이 훼손되었다.1952
출처: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사진자료실 | 소설가 박도 | 눈빛출판사의 ''지울 수 없는 이미지3''
1952
제3공화국
1961.7
1963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려고 1961~63년까지 대규모 해체와 복원 공사를 한 직후의 모습이다.1965.3
1970년대
참여정부
< 자료, 사진 출처 : http://www.namdaemunmarket.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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